내경 시대엔 ‘배(衃)’, 『상한론』에서 ‘어혈’ 용어 처음 사용
‘어혈(瘀血)’이라는 개념은 한의학에만 있고 서양의학에는 없었다. 그런데 최근 서양의학에서 ‘와파린’을 비롯한 몇몇 혈전(血栓)치료 약물들을 개발해 사용하면서 어혈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서양의학이 앞으로 혈전이나 어혈의 개념을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 연구 개발해 갈지 알 수는 없지만 개념이 좀 더 깊어진다면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소통에 적지 않게 도움되리라 생각한다.
이번 호에서는 어혈에 대한 한의학적인 개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고 단순 변증을 설명하는 역할 그 이상이 내포돼 있다는 것을 알아보자. 또한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임상적 이론적 연관성에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
▲ 내경 시대의 어혈
내경에서는 ‘어혈’이라는 단어가 없고 ‘배(衃)’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장생성편 제 10(五臟生成篇 第十)』에서는 “얼굴의 붉은 색이 죽은 피와 같으면 죽고 마른 뼈 같이 희면 죽는데 이런 오색이 보이면 죽게 된다. 푸른색이 깃털의 비취색과 같으면 살고 붉은 색이 닭 벼슬과 같으면 산다(赤如衃血者死 白如枯骨者死, 此五色之見生也 靑如翠羽者生 赤如鷄冠者生)”라고 하면서 ‘배’라는 용어를 진단에서 사용했다.
『수종 제 57』에서는 황제가 묻기를 “석가(石瘕)가 무엇입니까”라고 했을 때 기백 가로되 “석가는 자궁에서 생기는 것인데 한기로 자궁이 막혀서 기가 통하지 않게 되고 악혈이 사(瀉)해지지 않으면 혈액이 움직이지 않아서 배가 되고 날로 더 커져서 임신한 것 같이 되는데 모두 여자에게 있는 병으로 마땅히 하법(下法)으로 내려 보내야 한다”라고 했다.
『오금 제61』에서는 오역을 물었을 때 “신열이 있으면서 얼굴색이 희고 이후에 죽은 피가 나오면 혈배인데 이는 위중해서 사역(四逆; 네번째 역)”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보아 내경 시대의 ‘배’는 어혈의 개념을 사용해 병리 생리 진단 치료법에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상한론 및 이후 시대
『상한론』에서는 ‘어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방제로는 도인승기탕, 저당환, 저당탕, 하어혈탕, 대화자충환 등이 제시됐는데 이는 ‘배’라는 내경의 용어에서 일보 전진한 개념이다.
즉 ‘배’는 ‘혈이 기능을 못한다’는 뜻인데 비해 ‘어혈’은 ‘혈이 운행을 못하고 정체돼 있다’는 의미로 중경 선생의 창안으로 비로소 상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의 의가들은 어혈이란 단어를 좀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유문사친』에서 5회 사용했고 단계의 『격치여론』에서 1번, 『비위론』에서 2번, 『제병원후론』에서는 24번 쓰였다. 『의학입문』에 약 250번이 사용됐고 『동의보감』에서도 150회 정도 썼다.
청대 4대 천재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당종해는 그의 명저 『혈증론(血證論)』에서 혈병을 총망라해 설명하고 있다. 『제 5권 혈중어증치오조(血中瘀證治五條)』에서는 어혈을 다시 5종류인 어혈(瘀血), 축혈(蓄血), 혈고(血枯), 경폐(經閉), 태기(胎氣)로 나누어 제가설과 자신의 견해를 정리했다.
『6권 실혈겸견제증(失血兼見諸證)』에는 실혈(출혈)을 겸해 나타나는 제반 병증에 노채(癆瘵; 폐결핵), 해수, 발열, 한열, 궐랭 등 30종 이상의 다양한 병증과 질병들이 어혈과 관계돼 있음을 그의 수화기혈(水火氣血)의 이론에 근거해 논하면서 이법(理法)과 방약(方藥)을 세밀하게 제시하고 있다.
▲ 여혈과 담음의 연관성
당종해는 그의 저서 『혈증론』에서 “어혈 증상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많은 질병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일본 명의 탕본구진(湯本求眞)는 저서 『황한의학(皇漢醫學)』를 통해 만성 질병의 처방에서 항상 당귀작약산 또는 계지복령환을 추가해 어혈을 다스린 것과 상통한다.
단계(丹溪)의 『격치여론(格致餘論)』에서는 “칠정이 한 쪽으로 치우치고 오미(五味)가 너무 진하면 어찌 (장부의) 조화로운 덕이 상하지 않겠는가. 음식의 찌꺼기가 남아있고 담음이 머물며 어혈이 생겨 이들이 서로 얽혀서 오래되면 울결(鬱結)하여 적취(積聚)를 이루는데 심하면 호도 모양이 되기도 하고 기이한 벌레 모양이 된다. 이것은 중궁(中宮; 비장)이 맑지 모한 것이고 토덕(土德)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했다.
단계는 “어혈이 단순 어혈로만 병증이 형성되는 게 아니라 담음 혹은 복중에 남아 있는 조박(糟粕)과 함께 울결돼 적취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고 있다.
▲ 임상처방의 상관 관계
어혈 치료에 많이 사용하고 있는 임상처방인 금궤의 당귀작약산과 계지복령환의 처방 구성을 살펴보면 어혈이 다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귀작약산의 구성은 당귀 천국 작약 백출 복령 택사로 당귀 천궁 작약은 보혈하고 활혈하고 백출 복령 택사는 잉여의 남아도는 수분인 담음을 소변으로 배출시킨다.
또 계지복령환은 계지 복령 목단피 도인 백작약으로 되어 있어서 목단피 도인 백작약으로 활혈 파혈 보혈하면서 복령으로 수분을 배출하고 계지로 소변과 땀을 조절한다.
이로써 어혈이 수분과 함께 공존하고 있으며 맥관(脈管) 안에서 어혈로 인해 할 일이 없어진 수분은 담음이 되어 담음의 병변을 유발한다는 것을 처방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상한금궤방인 도인승기탕과 대황목단피탕에 대한 설명은 어혈에 대한 방제 해설에서 다루기로 하고 저당환, 저당탕, 하어혈탕은 담음 치료제가 없이 어혈을 공략하는 약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어혈을 급히 내리기 위한 것으로 마치 대승기탕이나 소승기탕에 감초가 없는 것과 같다.
금궤요략의 대황자충환은 건혈(乾血) 즉 수분이 없이 말라 있는 어혈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수제나 화담제가 없고 오히려 감초 지황 등 보습보혈제가 들어 있다. 이는 담음과 반대되는 뜻이지만 역시 담음의 개념이 엿보이는 것이다.
강주봉 원장(샬롬 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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